가만히만 있어도 떨리는 턱, 굳어버린 손과 지면에 닿아도 녹지않는 발걸음. 누가 낳았는지도 모르는 사생아. 병 걸린듯 하이얀 피부와, 동양인 답지않은 벽안. 커다란 얼음 호수 가운데에 움직이는 많은 인파속에 친모를 찾기에는 하늘의 별을 따는것이 더 쉬워보일 지경이였음은 분명했다.
거적이든, 어여쁜 비단 옷이든, 버려진 헌 옷이든 무엇이든 주워입지 못하면 곧 바로 얼어죽을듯 한 한기가 제 폐 속을 가득 채웠다가 나간다. 누가 낳았을지 모르는 사생아는 거지처럼..아니 거지로 지내는것이 정해진 사실이였다. 어쩌다 만난 거지 패의 왕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도 하루의 허기를 달래지 못하는 나날들을 보내었다. 조금,조금 따듯한 물을 마시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한 물 조차도 마시지 못했다. 물 한모금을 입에 대지도 못하니.. 따듯한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여느때와 같이 돌아다니는 추운 날이였다. 한걸음 한걸음을 비틀거렸고, 배를 곯았다. 앞은 늘 안개가 진 듯 흐리게 보였고 다 터진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어도 손이 시려왔다. 그렇게 또 한날, 한날. 쓰러질 듯 한 날 언젠가 차가운 골목의 길바닥에 주저앉으며 손을 모아 호호 거리어대도 따듯해지지 않는 손을 꼼지락 대던 그 날, 흐린 시야 앞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서는 날 지그시 바라보다가 확 잡아 들어 얼굴을 확인하는 듯 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내에게 반항할 힘도 없었을 뿐더러, 이대로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으니..사내의 손에 끌려가는동안 한기인지 긴장감인지. 아니면..기억을 잃은건지 모를것에 끌려가는 동안 어디로 가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음은 분명했다.
뜨문뜨문 기억나는 장면은 점점 사람이 많았다. 어딘가의 중심부로 향하는것 같았고, 팔려나가는 기분이 들었음은 확실했다. 그렇게 어딘가에 내려져서.. 우선 씻겨졌다, 사내의 손에 내려지고 나서는 어떤 여인 한명이 제 몸을 구석구석 씻겨주었다. 몇년이고 씻지 못해 냄새는 물론이고 묵은 때 까지도 흐르는 물에 씻겨나갔다. 물의 온도는 따듯했다. 늘 얼어 쓰지 못했던 바깥의 아무 물들은 이런 감정을 내게 안겨주지 못했지. 따듯했음은 분명하지만.. 울 것 같다거나 좋다거나 행복하다는 기분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왜 이곳에 와서 씻겨졌는지, 그 다음은 곱고 따듯한 옷을 입혀주었는지, 곯았던 배를 채우게 하고는 제 입에 집어넣은 약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모르고는.. 풀어진 긴장감 때문에 오래토록 잔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
.
하루? 이틀?삼일..? 얼마나 잤나 가늠도 되지 않았지만 주변에 물어볼 이는 더욱 더 없었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내 모습이 비춰진 거울을 보고는 눈을 끔뻑거렸다. 내 머릿칼이 원래 이리 하얬던가?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 몸에 떨어지는 털들은 죄다 검은색이었는데.. 머리가 새하얗게 바라있었기에..거울 앞으로 다가가 제 얼굴과 머리를 떠듬떠듬 만져보았다. 분명 제 얼굴임은 분명한데..머릿칼이 왜 이리 은빛깔로 바래버렸는지..
“우웁-!”
알 수 없는 기시감과 메스꺼운 속에 구역질이 나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전날 배 터지게 먹었던 그것들을 모두 게워내었다. 사내의 손에 이끌려 그 곳을 빠져나온 뒤로, 이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어느 하나 알고 있는게 없고, 알 수 있는것도 없었다. 하나 걸리는거라면.. 당연히 영문도 모르고 먹었었던 정으로 된 타국의 알약이었음이 확실하다.
설혼국은 항구와 무역의 발달로 외지인도 자주 들락날락 거려대니까.. 외국인인지, 내국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사내의 얼굴도 잘 모르겠고.. 정으로 된 알약도 어디의 것인지 모르는게 당연한 사실이였다. 먹은것은 다 토해내었고, 헛구역질만 반복하던 때에 또 누군가 들어와 입을 떼내었다.
“ 네 이름은 이제부터 백해 정, 백해 가(家)의 정이란다. “
무명(無名). 길거리에서 나고자란 사생아의 이름따위란 없다. 이름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스스로 정한 무성(無姓)의 이름 뿐들이었지만.. 대뜸 내게 성도 주고, 이름까지 하사한 상황이기에.. 어리둥절도 못하고 멍하니 그 누군가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